[이슈밸리=임정은 기자] 프랑스 수도 파리를 비롯한 전국 주요 도시에서 생활비 상승과 공공서비스 부실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가 폭동과 약탈로 변질되면서 수년 만에 최악의 소요 사태로 치달았다.
18일(현지 시간) 로이터 통신과 AFP 통신, 뉴욕타임스(NYT) 등 외신에 따르면 전날 프랑스 전역에서 프랑스 내무부 추산 55만명, 주요 노동조합인 노동총연맹(CGT) 추산 80만명에 달하는 대규모 인파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지난달 학교 환경 및 교육 여건 개선을 요구하며 시작된 고등학생들의 시위에 농민과 교사, 노동조합원, 공공부문 종사자들이 대거 합류했고 2018년 프랑스를 뒤흔든 '노란 조끼' 운동 동조자들까지 가세하면서 시위 규모가 폭발적으로 확대됐다.
시위 초기 파리 북동쪽 레퓌블리크 광장 등에서는 프랑스 국가 라마르세예즈를 연주하며 평화로운 행진이 이어졌으나 시위대가 루브르 박물관 일대와 중심가로 진입하면서 일부 과격 분자들과 기회주의적 집단이 가세해 무정부 상태를 방불케 하는 폭동으로 변했다.
파리 중심부 샹젤리제 거리와 라파예트 백화점, 셀린느, 디올 등 주요 명품 매장을 비롯해 보석상, 의류점, 은행, 우체국, 슈퍼마켓 등이 표적이 돼 진열장이 부서지고 물품이 약탈당했다.
마르세유에서는 에르메스 매장이 털리고 과격 분자들이 시청에 난입해 공화국의 상징인 마리안느 흉상을 넘어뜨렸으며 보르도에서는 지방행정 책임자 관저가 약탈당했다.
리모주에서는 143년 된 시청 건물이 불에 탔고 리옹에서는 관광안내소가 전소되는 등 문화재급 공공건물 잔해와 불탄 차량, 검게 그을린 집기들이 거리에 나뒹굴었다.
프랑스 유통업체 까르푸는 매장 50곳이 피해를 입고 이 중 20곳이 약탈당했다고 전했으며 프랑스 상업유통연맹 등은 전국 소매업체 약 1500곳이 파손되거나 약탈당해 피해 복구 비용이 수억 유로 또는 수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산했다.
프랑스 당국은 이번 사태로 전역에서 1800명 이상을 체포해 불법 시위 여부를 조사 중이며 경찰관 150명에서 600명 이상이 다쳤다고 발표했다.
파리 북부에서는 시위 중 심정지를 일으킨 참가자 1명이 숨졌으나 당국은 시위대 충돌과는 무관한 질환에 의한 사망으로 파악했다.
한편 과잉 진압 논란도 불거져 중부 생테티엔에서는 시위 참가자 1명이 손을 잃었고 북서부 알랑송에서는 경찰관이 법으로 금지된 방식을 사용해 소녀의 목을 팔로 감아 제압하는 장면이 포착되기도 했다.
시위대는 가혹하게 치솟는 집세와 연료비, 식비에 분노를 표출했다. 프랑스 통계청(INSEE)에 따르면 9월 소비자물가는 전년 대비 3.1% 올랐고 에너지 가격 상승률은 21.3%에 달했다.
그러나 이번 혼란의 근본 배경에는 수십 년간 고복지 체계를 유지하면서도 고령화와 저성장에 맞춘 구조 개혁에 실패한 프랑스 경제의 모순이 자리 잡고 있다는 지적이다.
에마뉘엘 마크롱 정부는 출범 후 법정 은퇴 연령을 62세에서 64세로 높이는 연금 개혁 등을 추진했으나 극렬한 반발에 봉쇄돼 지난해 개혁을 2028년 1월까지 중단하기로 야당과 합의했다.
조세 부담율이 GDP 대비 43.5%로 OECD 회원국 중 2위 수준임에도 공공 지출이 GDP의 57.2%에 달하고 국가 부채가 내년 GDP의 120%를 넘을 것으로 전망되는 등 방만한 재정 운용이 이어졌다.
심지어 재무부 보고서에 따르면 교육부 예산의 32%(약 285억유로, 약 42조7290억원)가 공무원 연금으로 충당되면서 학생 교육 지원이 뒷전으로 밀렸고 정부가 부채 이자로만 지난해 660억유로를 지출해 내년 국방(634억유로) 및 교육(655억유로) 예산보다 많은 900억유로를 이자로 지출해야 하는 구조적 악순환에 빠졌다는 분석이다.
내년 대선을 불과 6개월 앞두고 정치권의 책임 공방도 거세지고 있다. 여론조사 선두인 극우 국민연합(RN)의 마린 르펜 의원은 정당한 사회적 요구가 극좌파에 의해 악용됐다며 굴복하지않는프랑스(LFI)의 장뤼크 멜랑숑 대표가 소요 사태를 부추겼다고 비판했다.
반면 멜랑숑 대표는 정부가 재정 실패에 대한 시선을 돌리기 위해 과잉 진압과 정치적 이용을 하고 있다고 반박하면서도 약탈 행위에 대해서는 선을 그었다.
세바스티앵 르코르뉘 프랑스 총리는 공화국과 질서 세력의 편에 설 것인지 폭도 편에 설 것인지 선택해야 한다고 촉구했고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은 공화국에 폭력이 설 자리는 없다며 혼란을 조장하는 이들을 기소해 엄벌하겠다고 경고했다.
한편 이번 시위 여파는 이탈리아 로마·밀라노·토리노·볼로냐, 포르투갈 리스본, 벨기에 리에주 등 유럽 주변국으로 확산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