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너지-제조업 산업 체질 개선 시험대
금융 리스크 확산 차단 급선무
[이슈밸리=특별취재팀] 인공지능(AI) 반도체 수요 급증에 힘입어 고대역폭메모리(HBM4)를 중심으로 수출 실적을 확대해온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국내 증시 상승세를 견인하던 가운데,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긴장이 고조되며 국제 유가와 금융시장의 변동성이 동시에 확대되고 있다.
반도체 호황으로 회복 흐름을 보이던 한국 경제가 외부 에너지 리스크라는 새로운 변수와 맞닥뜨린 형국이라는 분석이 나온다.
미국의 이란 공습으로 이어진 호르무즈 해협의 긴장 고조는 배럴당 70달러 선에서 안정세를 보이던 두바이유를 단숨에 배럴당 78~79달러선까지 치솟으며 장중 한때 13% 이상의 상승폭을 기록했다.
특히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이번 사태가 4주 혹은 장기화할 것이라는 비관적인 전망을 내놓으며 글로벌 공급망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에너지 의존도가 절대적인 한국 경제로서는 반도체로 벌어들인 외화가 고스란히 원유 수입 대금으로 빠져나가는 ‘역성장’의 공포에 직면한 셈이다.
에너지 공급망 다변화와 한미 전략적 빅딜 현재 한국 원유 수입의 약 72%는 중동 지역에 편중되어 있으며, 이 중 90% 이상이 분쟁의 중심지인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한다. 이는 국가 경제의 목줄을 타국에 쥐여준 것과 다름없는 구조적 취약점이다.
◆ 전략 비축유 여력은 충분…구조적 취약성은 여전
이슈밸리 취재 결과 현재, 대한민국 정부가 보유한 전략 비축유는 2023~2024년 약 9,600만 배럴 수준이었으나, 2025년 말 기준, 1억 배럴(100 million barrels)을 돌파했다.
따라서 현재 정부 비축유만으로도 약 117일을 버틸 수 있으며, 민간 비축유(약 9,500만 배럴, 104일분)까지 합치면 총 221일가량 외부 수입 없이 견딜 수 있는 수준이다.
이는 IEA(국제에너지기구) 권고 기준인 90일을 훨씬 상회하는 세계 4위권의 방어력이다.
비축 기지는 울산, 여수 등 전국 9개 거점에 분산 저장되어 있어 비상시 즉각 투입이 가능하다.
유가가 10% 상승할 때마다 국내 경제성장률은 0.2%p 하락하고 소비자물가는 0.5%p 상승한다는 경제적 공식은 이미 현실화하고 있다. 이에 대한 첫 번째 돌파구는 트럼프 행정부의 ‘에너지 패권주의’를 역이용하는 고도의 외교 전략이다.
미국이 세계 최대 셰일 오일 및 천연가스 생산국으로 자리 잡은 가운데, 에너지 수출 확대를 통해 안정적 판로를 확보하려는 전략을 본격화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이에 따라 한국이 미국산 에너지 도입 비중을 현재 약 15% 수준에서 30% 이상으로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할 필요가 있다는 제언이 제기된다. 이는 단순한 수입선 다변화를 넘어, 미국과의 산업 협력 지형을 재구성하는 카드로 작용할 수 있다는 해석이다.
에너지 수입 확대를 계기로 반도체 보조금 유지와 대중국 수출 규제 완화 등 산업 현안에서 실익을 확보하는 이른바 ‘에너지-제조업 연계 전략’이 가능하다는 전망도 나온다.
◆ 에너지-제조업 산업 체질 개선 시험대
중동 지역의 지정학적 불확실성을 미국산 에너지로 일부 대체함으로써 한미 동맹을 경제·에너지 협력 축으로 확장하는 방안이 현실적 대안으로 거론된다. 동시에 나이지리아, 브라질, 가이아나 등 중동 외 지역과의 직거래 루트를 확대해 공급망 리스크를 분산해야 한다는 목소리도 적지 않다.
정부 차원의 정책 지원 필요성도 제기된다. 민간 정유사가 중동 외 지역에서 원유를 도입할 경우 발생하는 추가 운송비를 한시적으로 보전하는 ‘에너지 수입 다변화 지원책’을 검토함으로써 기업 부담을 완화할 수 있다는 분석이다.
아울러 과거 자원 외교의 시행착오를 교훈 삼아, 민간 주도의 해외 자원 개발 사업에 대해 국가 보증 및 금융 지원을 체계화해야 한다는 지적이 나온다.
석유화학 산업의 경우 나프타 의존도를 낮추기 위해 폐플라스틱 열분해유, 바이오 원료 전환 기술 등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를 확대하고 세제 인센티브를 강화하는 방안이 병행돼야 한다는 제언이다. 에너지 안보의 핵심이 단순 확보를 넘어 조달 방식과 기술 구조의 다변화에 있다는 점에서다.
반도체 산업의 역할도 주목된다. 최근 반도체 수출 호조는 한국 경제의 버팀목으로 평가되지만, 고유가가 전기요금 인상과 생산비 상승으로 이어질 경우 전력 집약적 산업의 가격 경쟁력이 약화될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된다. 이를 완화하기 위해 산업 전반의 에너지 디지털 전환(DX)을 국가 과제로 추진해야 한다는 의견이 나온다.
예컨대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개발 중인 차세대 저전력 AI 반도체 기술을 제조 공정에 우선 적용해 에너지 사용을 실시간으로 최적화하는 스마트 공장 체계를 고도화하는 방안이 거론된다.
업계에서는 에너지 소비 효율을 20% 개선할 경우 유가 하락에 준하는 경제적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분석도 내놓는다. 이에 따라 기업이 반도체 수익을 에너지 효율화 설비에 재투자할 경우 세액 공제 폭을 확대하는 제도적 장치가 필요하다는 전망이다. 이는 고유가 대응과 탄소중립 경쟁력 확보를 동시에 도모하는 전략으로 평가된다.
◆ 금융 리스크 확산 차단해야...주요국과 통화스와프 상시화
금융 측면의 대응도 과제로 꼽힌다. 유가 급등에 따른 수입 결제 대금 증가는 달러 수요를 자극해 원·달러 환율 상승 압력으로 이어질 수 있다. 환율 상승은 일부 수출기업에 긍정적 요인이 될 수 있으나, 원자재 가격 상승과 가계부채 부담을 감안하면 거시경제 전반에는 부담 요인으로 작용할 가능성이 있다.
외환 당국이 시장 변동성을 완화하는 미세 조정을 병행하는 한편, 한미 통화스와프 상시화 등 대외 신뢰도를 높이는 안전판 마련이 필요하다는 지적이다. 일본·호주 등 주요 우방국과의 통화 협력도 금융 리스크 확산을 차단하는 방안으로 거론된다.
기업 경영 전략 역시 변화가 요구된다. 글로벌 공급망 충격이 반복되는 환경에서 기존의 적기 생산(Just-in-Time) 중심 체계에서 일정 수준의 전략적 비축을 병행하는 ‘적기 비축(Just-in-Case)’ 체계로 전환해야 한다는 분석이 나온다.
종합하면, 고유가와 지정학적 리스크가 중첩된 환경에서 한국 경제의 대응 방향은 에너지 공급선 다변화, 산업 구조의 고효율 전환, 금융 안전판 확충이라는 세 축으로 요약된다.
반도체 초격차 기술을 에너지 효율 혁신과 결합해 위기를 구조적 경쟁력 강화의 계기로 전환할 수 있을지가 향후 관건으로 보인다. 정부와 기업이 정쟁과 단기 변수에 매몰되기보다 경제 안보 차원의 전략적 대응에 집중할 필요가 있다는 분석이 힘을 얻고 있다.
재계 한 관계자는 “이번 위기는 단기 유가 충격을 넘어 한국 경제의 구조적 에너지 의존도를 점검하는 계기”라며 “반도체 수익을 기반으로 에너지 효율 투자와 공급선 다변화를 동시에 추진한다면, 오히려 산업 체질을 한 단계 끌어올리는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분석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