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슈밸리=사설] 나라 살림이 821조원에 이르렀다. 이재명 대통령은 2일 시정연설에서 올해보다 12.8% 늘어난 820조9천억원의 내년도 예산안을 설명하며 ‘모두의 성장’을 강조했다.
반도체가 벌어들인 성장의 과실을 청년과 지방, 미래산업에 돌리겠다는 구상이다. 수출기업의 호실적이 동네 가게의 매출과 청년의 취업으로 이어지기를 바라는 마음은 정부를 지지하든 비판하든 다르지 않을 것이다.
재정이 그 사이를 메우는 역할을 할 수 있다. 어려운 가계에 대한 지원과 장기적인 산업 투자에는 정부가 나설 이유도 충분하다. 다만 이번 예산안은 반도체 호황이 만들어낸 여유를 앞으로 얼마나 믿고 써도 되는지, 그 판단부터 국회의 검증을 받아야 한다.
국민의힘이 지적하는 대목도 여기에 걸쳐 있다. 일시적으로 더 걷힌 세금에 기대 지출을 크게 늘려도 되는지, 약 162조원의 미래대응기금을 만들면서 국회의 통제가 느슨해지는 것은 아닌지, 여유가 생겼을 때 나랏빚부터 더 갚아야 하는 것 아닌지가 주요 쟁점이다. 거친 정치적 수사를 걷어내면 나라 살림을 심의하는 국회가 마땅히 따질 문제들이다.
정부의 반론도 함께 봐야 한다. 정부는 내년 국가채무 비율이 국내총생산 대비 48.3%로 내려가고 관리재정수지 적자도 0.1%로 개선된다고 설명한다. 이 수치를 외면한 채 예산 증가분을 모조리 빚으로 충당하는 듯 말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
그러나 전망대로 세금이 걷힐 때의 계산만으로 수년 뒤의 지출까지 안심할 수는 없다. 반도체 경기가 꺾이거나 세수 증가세가 둔화했을 때의 살림도 설명에 들어 있어야 한다.
국회예산정책처는 미래대응기금의 주요 재원인 추가세수가 2027~2028년에 발생하고 2029년 이후에는 발생하지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세금 자체가 사라진다는 뜻은 아니다. 법안이 정한 장기 추세치를 넘어서는 세입이 더 이상 생기지 않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반면 지원금과 수당은 한 번 지급하기 시작하면 줄이기 어렵다. 수입은 일시적인데 지출은 매년 이어지는 구조라면, 몇 년 뒤 부족분을 무엇으로 채울지 지금 답을 내놔야 한다.
지원 대상인 국민에게도 이는 먼 훗날의 재정 논쟁으로 끝나지 않는다. 정부 약속을 믿고 아이를 키우고 저축 계획을 세웠는데 재원이 부족하다며 지원을 줄이면 가계의 계획부터 틀어진다. 다른 세금이나 부담을 늘려 메운다면 혜택을 받지 못한 사람까지 비용을 나누게 된다. 지원 규모를 발표할 때 지속 기간과 재원 대책을 함께 밝혀야 하는 까닭이다.
당장의 생활도 따져볼 일이다. 지원금을 받아도 월세와 장바구니 지출이 더 늘면 가계 형편은 나아지기 어렵다. 재정 확대가 물가를 반드시 밀어 올린다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출의 시기와 대상을 잘못 고르면 정책 효과가 줄어들 수 있다.
청년 예산은 교육·훈련에 참여한 인원 이후의 취업과 근속까지, 주거 예산은 공급 계획 이후의 실제 입주와 임대료 부담까지 확인해야 한다. 대통령이 말한 성장의 확산은 그 지점에서 평가받게 된다.
돈을 쓰는 절차에도 같은 엄격함이 필요하다. 야당은 미래대응기금의 운용계획을 정부가 바꿀 수 있는 범위를 문제 삼고 있고, 국회예산정책처도 재정통제 강화를 주문했다. 집행에 속도가 필요하다는 이유로 국회의 심의를 번거로운 절차쯤으로 취급해서는 곤란하다. 어느 지역과 기업에 얼마를 배분하는지, 계획을 바꾼 이유는 무엇인지 공개해야 정치적 배분이라는 의심도 줄일 수 있다.
대형 사업에 가려지기 쉬운 살림도 있다. 지역 응급실과 돌봄 현장에 필요한 인력, 군의 대비태세, 재난 예방시설의 유지·보수는 해마다 꾸준히 돈이 들어간다. 새로운 사업을 발표하는 만큼 기존의 필수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는지 살펴야 한다. 지방에 시설 하나를 짓더라도 완공 뒤 이용할 사람과 운영비까지 계산해야 한다. 건설비를 확보한 것으로 정부의 책임이 끝나지는 않는다.
반도체 호황이 마련해준 재정 여유는 분명 기회다. 필요한 곳에 투자하되 불황에 대비할 몫도 남겨야 한다. 세수가 줄어도 유지할 지원, 성과가 없으면 접을 사업, 미래세대에 넘길 부담의 한계를 이번 심사에서 분명히 정할 필요가 있다. 821조원 예산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정부가 그 책임을 얼마나 구체적으로 약속하고 지키느냐에 달려 있다.

